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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런치 모드 : 개발자들의 돌연사

한빛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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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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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빛

27,751

우연인가 필연인가

 

게임개발자가 돌연사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2016년 7월, 그리고 2016년 11월. 과로사로 추정됐다. 해당 게임업체는 “과로와 연관 지을 근거가 없다” “절대 과로사는 아니다”라고 못 박았지만, 사실 과로사 추정이 유별난 게 아닐 정도로 게임업계의 야근과 밤샘노동은 흔한 일이다.

장시간 노동이 새로운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연달아 개발자들이 쓰러진 이유는 뭘까? 우리는 여기서 장시간 노동이라는 오래된 관행에 새로운 위험 요인이 더해지면서 발생한 사고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 개발 환경의 변화가 어떻게 노동자의 건강 문제로 연결되는지 짚어봐야 하는 대목이다.

물론 잇단 사망사고를 예외적인 상황들의 우연한 연속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적인 예외라 하더라도 노동자의 죽음 자체는 조직, 환경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상징적 징표가 된다. 또 망자의 연령대가 20~30대였다는 점, 사망사고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에 구조적 문제들이 놓여 있음을 의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통상적인 사망률에 비추어 봐도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라는 지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뇌심혈관 질환에 의한 20~30대의 사망률이 10만 명 당 10명 미만인 것에 비해 위에서 언급한 사망 사건의 사망률은 10만 명 당 66.7명으로 매우 높기 때문이다(직원 3천 명을 10만 명으로 가정하고 사망률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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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인과론적 원리를 찾지 못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할 수 없을 때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건이 우연히 발생했다고 해서 원인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벼락을 맞는 것처럼 우연에 가까운 일이라 하더라도 벼락 맞을 장소에 자주 반복 노출된다면(구체적인 상황) 노출 위험으로 발생한 사고는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그 장소에 가지 않았다면 벼락 맞을 우연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벼락 맞는 일이 우연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특정 장소에서의' 확률은 필연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게임 노동자의 숙명

 

게임업계의 장시간 노동은 '살인적'이라 표현할 만큼 악명이 높다. 실태 조사는 물론 신문 기사나 구술 인터뷰, 블로그 게시물, 댓글 등 여러 텍스트를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상황이다. 야근과 밤샘은 게임업계의 보편적 특성으로 파악된다. 각각의 케이스나 회사별, 국가별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14년 일본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도쿄 토이박스>는 '그저 게임이 좋아 게임업계에 뛰어든' 주인공이 '칼퇴는 금물' '철야는 기본'인 회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이는 생존 투쟁을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게임 개발 환경을 '덜 뜨거운 지옥'으로 평가한 한 인터뷰이의 얘기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의 개발 환경은 더욱 열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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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개발자에게 야근은 숙명이다. 야근에 밤샘을 밥 먹듯 해야 할 형편이라 스스로 '하이테크 노가다'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몇몇 개발자와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직원을 갈아 마신다/넣는다'는 자조적 표현이 반복됐다. '최소한의 비용을 들이고 공대 출신 개발자들을 갈아 넣어 만든 결과물'이라는 뜻의 오래된 은어인 '공밀레'라는 표현도 이와 상통한다.

크런치 모드는 공밀레의 21세기 버전이다. 업계 은어로 출시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길게는 수개월 동안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개발자를 으깨 넣는 업무 관행을 말한다. 업체들이 오해 또는 오명이라고 말하는 '판교의 등대' '구로의 등대' '오징어잡이 배'라는 표현은 크런치 모드가 무한 루프처럼 반복되는 게임업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어다. '발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다면 한두 달씩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크런치 모드 기간일 거라는 얘기도 있다. 다른 인터뷰이들의 “우리도 등대”라는 구술은 게임업계에 야근과 밤샘노동이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는지를 말해준다.

 

작품을 위한 감내의 과정

 

게임업계 노동자들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시간 연속 노동을 당연한 일상처럼 표현한다. “6개월짜리 프로젝트를 할 때는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토요일에 퇴근한 적도 있어요. 회사 근처에 전셋집을 구해놓고 남자들 대여섯 명이 엉켜서 자는 거죠.” “수면 부족은 기본이고, 의욕 상실에 희망도 없어요. 모든 게 다 무너져버려요. 주당 100시간씩 아홉 달 동안 일했어요.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런 환경에선 작동할 수 없어요.” 기괴한 정도의 장시간 노동을 일상적 풍경처럼 무덤덤하게 내놓는 답변 또한 장시간 노동의 일상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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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태 조사에도 비참한 숫자들이 난무한다. 2013년 국회사무처가 발간한 보고서 <IT노동자 근로실태조사 및 법·제도 개선 방안>에 따르면, 주 5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63.3%에 달하고 7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도 19.4%에 육박했다. 또 넷마블 전현직 개발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30시간 이상 연속 근무한' 비율이 전현직 각각 54.3%, 30.5%에 달했다. 2017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게임 노동자 62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크런치 모드 시기의 게임 노동자는 하루 평균 14.4시간을 근무하고, 응답자의 84.2%가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다. 다음의 내용은 노동건강연대가 실시한 '넷마블 전현직 게임개발자 대상 노동 조건 설문조사'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토일 중 한 번은 꼬박꼬박 나간다.

 

월급 받은 만큼 일하는 건 쓰레기라고 한다.

 

일주일에 '두 번 출근'을 1년 했다. '두 번 출근'은 아침에 출근해 2박 3일 또는 3박 4일을 연속해서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주말에는 좀 쉬자. 기계도 쉬지 않고 돌리면 과열되서 고장 난다.

 

직원을 갈아 마시는 곳으로 악명이 높다. ··· 사람을 갈아 게임을 만들고 있다.

 

오전 10시 출근인데도 매일 9시 반에 미팅을 강조하며 업무 공유를 강요한다.

 

죽을 것 같아 그만뒀다.

 

쉬지 못하고 일하다 우울증이 왔다. 죽어서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어 결국 퇴사했다. 그런데 퇴사하는 날까지 야근을 했다. 어쩔 수 없다고 한다. XX, 어쩔 수 없는 게 어딨어?

 

게임업계에서 장시간 노동은 당연한 일 또는 일종의 감내 과정으로 여겨진다. 직접 인터뷰했던 한 게임개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예술혼과 헝그리 정신을 불태웠다.” 일종의 장인 노동 같은 '인고의 과정'처럼 인식하는 듯했다. 2~3일 밤샘을 안 해 봤으면 “아직 개발자 되려면 멀었다”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

 

장시간 노동은 억압 기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과거엔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개발 기간이 길었고, 개발 과정의 자율성이 높았으며, 성공 신화의 인식이 비교적 넓게 깔려 있어 장시간 노동이 문제화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개발 환경이 급변했다. 주력 플랫폼이 변화하면서 개발 기간도 달라지고 개발자의 태도나 상태도 변했다. 이러한 가운데 장시간 노동의 가혹함은 정도를 더해 가면서 게임 노동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감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감내의 한계치가 법정 기준을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됐다. 오랜 관행에 '새로운 위험'이 덧대지면서 죽음의 위험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잇단 사망사고를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 간주하고, 반복된 죽음을 양산하는 새로운 위험의 구조적 특징으로 유형화하고자 한다. 개발 방식과 프로세스의 변화, 개발 문화의 변화, 기업 관계의 변화 속에서 만성적 과로 위험과 중첩되는 새로운 위험은 무엇일까?

 

모바일로의 전환

 

첫째, 주력 플랫폼이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급변했다. 해외 유수의 개발사들도 스마트 기기 관련 게임 개발에 관여하고 주력 플랫폼을 모바일로 전환했다. 앱스토어, 구글플레이 등 모바일 게임의 론칭 창구 또한 늘어났다.

국내 모바일화의 속도도 맞아떨어졌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 초고속 인터넷 환경이 상당히 짧은 시간 내에 구축됐다. 스마트 기기의 성능은 계속 업그레이드됐고, 기기 보급률도 매해 두세 배 증가했다. 2009년 2%에 불과했던 스마트폰 보급률이 84.1%(2014년 기준)까지 올라갔다. '사회의 스마트화' 혹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내걸 정도로 기술 효과의 파급력은 상당했고, 기술 진보를 앞세운 언어와 숫자들이 넘쳐났다.

모바일로의 전환은 국내 온라인 게임 시장의 위기와도 맞물려 있다. 온라인 시장이 초토화됐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당시 온라인 게임 시장은 위축되어 있었다. 특히 셧다운제 시행(2011년 11월)으로 온라인 게임의 위기는 가속화됐다. 온라인 게임은 2013년 들어서면서 시장 규모가 전년 대비 19.6% 감소했다. 시장 내 비중도 70%(2012년) 수준에서 56.1%로 떨어졌다. 게임산업 전체 노동자 수도 2012년 5만 명 수준에서 2013년 4만 명 수준으로 연속 감소하고 있다. 

온라인의 위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형 게임사의 시장 독점화에서 비롯한 대작 게임 서비스 중심의 구조 조정, 특정 인기 게임으로의 쏠림 현상, 대형 게임의 흥행 실패, 중소형 개발사에 대한 대형 게임업체의 실력 행사(인기 있는 개발사의 자사 편입, 그렇지 못한 개발사 내치기)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한편 몇몇 게임이 '국민 게임' 반열에 오르면서 업체들의 모바일 유입은 더욱 늘었다. 모바일 게임으로의 이동은 자본의 위기에 대한 타개책이기도 했다. 모바일 게임의 규모는 순식간에 약 200% 가량 증가했다. 

모바일 주력 플랫폼이 급변하면서 게임의 생산과 유통, 소비 과정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개발 기간이 이전에 비해 훨씬 짧아졌다. 온라인 시절 3~5년 정도였던 개발 기간은 모바일로 넘어오면서 1년도 채 안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유행 주기도 훨씬 짧아졌다. 대형 게임 업체들은 유행을 선도하고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게임 출시를 공격적으로 감행한다. '찍어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형국이라고 한다.

게임 엔진 기술의 변화도 개발의 가속화에 한몫을 한다. 게임 엔진을 직접 짜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기성품처럼 나온 게임 엔진을 주로 사용한다. 이미 만들어진 게임 엔진에 필요한 모듈을 얹는 방식으로 대형업체들은 게임을 더 빨리 찍어낸다. 개발의 편의성과 속도를 높이는 방식이 역설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게임 개발을 제한하기도 한다. '돈 되는' 게임을 찍어내는 대형업체의 속도전이 개발자의 세계관이나 자부심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다.

 

원래 프로세스라면 자기 의사도 반영하고 원활하게 같이 논의해야 하는데, 개발 기간이 짧으니까 논의할 시간이 없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되죠. 좀 더 여유롭게 할 시간도 없고 만들 것만 만들죠. 그것만 해도 벅차니까요.

—게임개발자 A씨

 

너희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데려와 개발할 수 있다, 이런 기준이에요. 실제 그렇게 했는데도 성공하니까 계속 그렇게 나가는 거고요. PC 온라인 시대에서 모바일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게 더 심해진 거죠. 모바일은 금방 만들고 금방 출시해서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구조예요. 적은 인건비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으니 그게 더 심해진 거죠. 

—게임개발자 B씨

 

목표나 목적 자체에서 차이가 많이 나요.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매출! 이 게임을 어떻게 마케팅하고 어떻게 운영해서 매출 얼마를 내야 된다는 게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매출을 높이면 목표를 달성한 건데, 개발자 입장에서는 또 그렇지 않잖아요.

—게임개발자 C씨

 

개발 프로세스가 달라졌으니 노동과정의 흐름도 속도를 따라가야 했다. 론칭할 때나 업데이트, 이벤트를 할 때마다 야근과 밤샘이 이어졌다. 크런치 모드의 빈도는 더 잦아졌다. 새해, 설날, 어린이날, 여름방학, 겨울방학, 개학 전후, 휴가 시즌 등 사실상 늘 이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위험의 첫 번째 요소다.

물론 크런치 모드가 업계의 새로운 풍경은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설득 과정을 거쳐 필요할 때 진행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개발 기간과 업데이트 주기의 단축으로 인해 크런치 모드는 더욱 잦아지고, 이는 개발자의 건강 회복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추정된다. 특정 기간에 집중된 장시간 연속 노동을 월 단위 또는 주 단위로 규제하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까라면 까야지

 

둘째, 개발 프로세스상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위험이 있다. 전통적으로 개발 과정은 폭포수 프로세스(분석 → 설계 → 개발 → 구현 → 테스트 → 유지 보수)를 따른다. 전체 계획을 가지고 전 과정을 중앙에서 관리, 통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폭포수 프로세스는 유행이나 기술의 빠른 변화를 담아내는 데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형태의 프로세스가 여럿 언급되고 있지만, 중앙 통제식 관리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사업부 주도로 개발 일정을 무리하게 짜거나 갑자기 일정을 줄이거나 계획서에 없던 요구를 들이밀기도 한다. 중간에 일방적으로 개발 프로젝트를 엎는 경우도 있어 개발자의 부담과 불안정성은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 

 

유행에 따라 이렇게 바꾸자 저렇게 바꾸자며 없던 요구들이 훅 들어온다. 

—게임개발자 S씨

 

사업부가 정말 힘이 세요. 저희끼리 얘기할 때는 “거의 깡패”라고 얘기해요. 사업부가 들어오면 회의도 길어져요.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고···. 저는 잘 모르겠어요. 특별히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합법적으로 쪼거든요.

—게임개발자 M씨

 

지금 그런 개발사 퍼블리셔 구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에요. 어떤 개발사가 퍼블리셔와 계약을 한다고 하면 요구하는 것들을 개발사가 맞춰주게 되어 있어요. 보통은 퍼블리셔가 거대 자본을 든 갑의 입장이고, 그런 관계에서 계약을 맺게 되니까요.

—게임개발자 K씨

 

개발 과정상의 공정 마감을 '허들'이라고 하는데, 계획에 없던 허들이 훅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사업부가 '돈 될 만한' 아이템을 끼워 넣으라는 요구가 대부분이다. 개발자들은 “허들을 넘기 위해 개발하는 꼴”이라고 자괴한다.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프로세스 혁신은 변화에 맞선 대응이라는 이유 아래 잦은 개입의 형태를 띤다. 더욱 잦아진 크런치 모드의 성격이 이전과 달라진 지점이다. 

개발자에게 개발 과정상의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해외 경우에 비해 개발 과정이 비합리적이라고 지적되는 이유다. '크런치 모드는 필요악인가'라는 질문에 한 개발자는 “일정만 잘 짜도 크런치 모드는 없앨 수 있다”고 말했다. 운영 방식에 따라 크런치 모드의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부품에 불과해

 

셋째, 노동자의 상태 차원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위험도 주목할 지점이다. 개발 과정의 모듈화로 개발의 물량이나 속도는 몇 배나 많아지고 빨라졌다. 동시에 단순 반복 작업을 해야 하는 부품화 경향이 더해졌다. 과거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작품'에 '예술 혼'을 불태웠던 개발자들은 개발 규모와 속도가 빨라진 요즘, 단순 기능공처럼 부품화되는 경험을 겪고 있다. “톱니바퀴” “소모품” “기계 부품”이라는 표현을 아예 대놓고 하는 경우도 있다. 부품화에 일상적 언어 폭력이 더해지면서 소외는 더 심해졌다.

 

착취하기 좋은 구조가 되는 거죠. 예전에는 개인의 역량이나 이런 것들에 좌우가 됐다면 지금은 산업화, 부속화 이렇게 되는 거죠. 몇 명 투입하고 이렇게 해서 몇 장 그리고, 오늘까지 이만큼 하고 뭐 이런 분위기가 점점 가속화되는 거죠. 일상은 단조로워지고.

—게임개발자 G씨

 

한편 개발 과정의 모듈화에 따라 진입 장벽이 낮아졌고, 더 많은 청년 개발자들이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부품화는 더욱 가중됐다. 이는 다시 다수 개발자들의 저임금–장시간 노동 조건으로 연결되고, 고용 불안정에 노출될 위험성은 더욱 높였다.

 

물론 개발 방식의 변화로 관계 양상까지 달라졌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차림새나 호칭 등 개발 문화는 비교적 자유로운 면모를 보인다. 그렇지만 이전에 비해 자유로운 관계나 의사소통에 기초한 개발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개발자들의 성공 신화에서 비롯한 꿈의 크기도 이전만큼 크지 않다. '회사 직원'으로서 일하는 것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기술 변화–개발 과정의 변화–개발 문화의 변화–노동자 상태의 변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할 점은 부품화 경향이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노동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직적 대응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부품'이라는 생각 때문에 노조 형태의 교섭 창구를 만드는 건 실제 언감생심에 가까운 일이다. 업계 평판에 대한 두려움 또한 집단적 발언권을 제약한다.

노동자성이 미약하다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일반화할 수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내가 어떻게 노동자냐”라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다.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인터뷰이도 종종 눈에 띈다. 현실은 '3D 노가다'일지언정 그래도 개발자나 디자이너 같이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현실은 부품화라는 소외 상태에 놓여 있지만, 역설적 표현으로 문제의 현실이 봉합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더욱 잦아진 장시간 노동의 폭력성과 불안정성은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하청화 그리고 이직의 일상화

 

마지막으로, 기업 관계 차원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위험을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게임업계는 기업과 소비자가 직접 거래하는 관계였고, 갑이 없는 형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퍼블리셔(배급사)와 개발사 간의 위계가 생겨났고, 관계는 더 위계화됐다. 기획은 대형 퍼블리셔가 주도하고, 중소 개발사는 명령을 수행하는 형태다. 시장 내 유통 파워가 더욱 부각되면서 중소 개발사들은 대형 퍼블리셔 사업부의 실력 행사(일정 단축, 단가 낮추기, 갑작스러운 요구 등)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대형 퍼블리셔는 강력한 유통 파워를 앞세워 게임의 홍보와 유통, 출시 시기를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개발사의 매출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 대형 퍼블리셔는 자회사 형태의 여러 개발사와 관계사를 거느리면서 개발사 간 경쟁을 유도하고 결과물을 수시로 평가해 그 가운데 상품 하나를 고르고 론칭한다. 상품의 휘발성이 높고 소비자의 다변화된 욕구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시장에서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상품목록화 전략이다.

 

상품목록화 전략은 게임, 영화, 음악, 방송 등의 문화산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유통 과정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더 확대시킨다. 대형 퍼블리셔의 위험 분산 전략은 상품의 시장 성공률을 높이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개발 과정상의 리스크를 중소개발사 및 개발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은 분명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모바일 게임은 개발 기간이 짧다 보니 한 번에 여러 개 프로세스를 발주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PC 온라인 게임 하나 만들 투자 금액이면 모바일 게임 일곱, 여덟 개를 만들 수 있거든요. 이렇게 진행을 하고 나서 이 게임 저 게임은 안 될 것 같으니 자르고, 될 것 같은 게임 하나만 밀어주는 거예요. 하나만 성공하면 나머지는 다 커버가 되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중간에 엎어지는 경우가 더 많죠.

—게임개발자 L씨

 

전환 배치 받아서 온 사람이 능력이 없어서 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게임이 잘 안 됐구나 생각하죠.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서로 왕따 시키거나 문제 제기하거나 그런 경우는 별로 없어요.

—게임개발자 K씨

 

정직원으로 들어가지만 프리랜서 느낌이 강해요. 프로젝트가 접히거나 그러면 퇴사 사유다 이런 내용이 계약서에 다 있어요. 대개 다 이직을 하고··· 그게 관례죠.

—게임개발자 G씨

 

출시 경쟁에서 밀린 개발사는 다른 게임업체에 편입되거나 아예 회사를 접어야 한다. 개발자들은 권고 사직을 당하거나 전환 배치를 받기도 한다.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괜찮은 게임이 나오지 않으면 다들 이직부터 생각할 정도로 이 분야의 이직은 매우 잦다. 평균 근속 기간은 3년에 그친다. 기업 수명이 5년 미만인 비율이 57%에 달한다. '프로젝트 중단은 곧 이직'이라는 관행 때문에 고용의 불안정성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대형 유통 자본의 폭력적 기획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장시간 노동의 폭력성은 구조적으로 재생산되게 마련이다.

 

더 불공정하고 더 잦아진 야근

 

'개발사의 소작농화'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앱스토어, 구글플레이 같은 플랫폼을 매개로 자본은 생산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도 배타적 통제, 유통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취하고 있다. 게임의 전체 이익 가운데30% 정도가 초국적 플랫폼 자본의 수익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유통 파워가 뒷받침되지 않는 중소형 개발사는 콘텐츠만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수익은 유통 자본에 대거 흡수되고, 실패의 위험은 중소형 개발사에 전가되는 양상이다.

게임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이 6% 이상을 기록하고 매출 총액이 10조 원에 달해도 개발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오히려 하락하는 이유는 이러한 수익 분배 구조 때문이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재생산이 불공정한 수익 분배 구조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플랫폼을 매개로 한 국내외 자본의 막대한 수익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한국 시장은 그런 대규모 몇 개의 게임이 독과점하는 형태예요.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이 점점 더 유리해지는 상황이고, 소규모 개발사들은 오히려 다양한 시도를 하기에는 너무 가난해진 상황이 온 게 아닌가 싶어요.

—게임개발자 J씨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주력 플랫폼이 변화하면서 달라진 지점들을 요약해보자. 개발 주기가 상당히 짧아졌다. 유행 속도도 빨라졌다. 노동자에게 부담으로 여겨지는 크런치 모드의 빈도도 그만큼 잦아졌다. 업데이트 주기도 이전보다 빨라졌다. 시장과 유행, 기술의 변화 속도가 빨라져 개발 프로세스 또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데 여전히 중앙 통제식 프로세스가 유지되고 있다. 또 개발의 가속화로 개발자의 부품화 경향은 더 높아졌다. 대박 신화도 희미해지고 있다.

더욱 잦아진 야근과 밤샘노동에 대한 보상도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고질적인 제도에 기댄 거대 자본의 노골적 저비용 전략에 게임 노동자들은 무제한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개발사와 퍼블리셔 간의 관계가 불공정하게 흐를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턱밑까지 차오른 장시간 노동의 관행에 새로운 위험 요인들이 일종의 방아쇠처럼 작용하면서 과로사가 격발된다. 이는 전통적 형태의 과로사와는 달라 '신자유주의적' 과로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물론 죽음을 유발하는 수많은 복잡성 때문에 원인을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만성화된 장시간 노동에 새로운 위험이 덧대지면서 발생하는 죽음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현상으로 분류하고 면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실태 조사부터

 

이와 같은 문제를 가시화하는 방법의 하나로 현재 발행되고 있는 <게임 백서>에 '노동자 실태 조사'를 추가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게임 백서>는 시장 전망이나 업계 동향, 이용 현황이나 업체별 노동자의 현황 등을 담고 있다. 여기에 노동시간 실태를 연간, 분기간, 월간, 주간 단위로 구체화하고, 특정 시기의 집중적 장시간 노동인 크런치 모드의 빈도나 기간까지 체크할 필요가 있다. 문제 재발 방지 방안의 하나로 장시간-저임금을 재생산하는 포괄임금제 폐지도 논의되어야 한다.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적 대응이 절실히 필요하다.

새로운 위험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대안으로 기업 간 불공정 거래를 차단하고 수익을 공정하게 분배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이 요청된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고,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는 말처럼 개발사와 퍼블리셔, 플랫폼 사이의 수익 양극화는 매우 심화된 상태다. 현저하게 낮은 단가 책정, 일방적 가격 정책, 계획에 없던 요구, 계약 내용 불이행 등 불공정 거래는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개발사들의 리스크 가중은 게임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리고 게임 노동자의 건강을 심히 악화시킬 것이다.

현재 게임업계의 구조 속에서 제3의, 제4의 사망사고는 예견된 것이다 다름없다. 개발자들의 죽음은 우연히 발생한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 위험에 노출되면서 발생한 필연적 비극이다. 개발자 모두의 현실, 업계 전체의 실태가 여기에 담겨 있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죽음이 특정 집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과로에 노출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질병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출처 :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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