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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여가/책

한눈에 보는 세계지도의 역사 - 청소년 인문학 수업(역사·예술·문학)

한빛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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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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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빛

25,930

지도를 가진 자 세계를 제패한다.” 문명의 시작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흔적은 모두 지도 위에 나타나 있다. 찬란했던 문명은 흥망성쇠의 길을 걸으면서도 산맥을 넘어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더 멀리 더 빨리 하늘을 날려던 인간의 첫 도전도 지도 위에 남았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났던 인간의 상상력은 지구 너머 우주로 확장되고 있다.

 

원시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하던 시절, 인간은 어느 산에서 어떤 열매를 주울 수 있는지, 또 어느 지역에 어떤 동물이 살고 있는지 동굴 벽에 그려놓았다. 이러한 그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행위이자 인류가 지구 표면에 남긴 최초의 지도가 된다. 이런 바위지도는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1931년경 이라크 키르쿠크 근처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바빌로니아시대의 점토판 지도가 있다. 점토판에는 두 개의 산과 수로, 마을이 그려져 있고 쐐기 문자로 ‘아잘라Azala’라고 쓰여 있다. 아잘라는 토지 주인의 이름으로, 이 지도는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2300년경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지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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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세계지도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 지방의 발카모니카에서 발견된 ‘바위지도’는 기원전 15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람들이 살았던 촌락・길・경작지등이 직선과 곡선을 이용해 그려져 있다. 기원전 600년경에 제작된 바빌로니아 세계지도도 있다. 점토판에 그려진 이 지도에서 지구는 고리 모양의 물길에 둘러싸인 조그만 원반처럼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중앙에는 수도 바빌론과 시가지를 관통해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이 그려져 있다. 이는 지구 전체를 나타내고자 의도한 최초의 세계지도다.

 

 

 

 

땅에 대한 이해에서 천문에 대한 상상까지

 

이처럼 고대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을 지도로 그려 이해하려고 했다. 고대의 세계지도는 대부분 실제로 관측해 그린것이 아니라 신화 속 이미지를 형상화하거나 주변의 정황 표시 정도를 나타낸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실제 여행이나 항해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지도를 그리려 노력했다.

 

본격적인 세계지도 제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Ⅲ Magnus의 세계 원정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폭넓은 항해와 무역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땅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로소 실제와 가까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 측량기사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구는 하나의 대양으로 둘러싸인 구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특히 천문학자였던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지구를 완전한 구형이라 가정한 후 지구 둘레를 계산했고, 처음으로 지도에 경도와 위도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그가 측정한 지구 둘레의 크기를 현대에 와서 측정한 것과 비교하면 불과 15퍼센트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지도 제작술은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는 《지리학》을 통해 세계지도를 소개했다. 로마시대의 지리적 지식을 모아 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세계를 지도에 담았다. 그가 그린 반구도半球圖에는 현재와 비슷한 모양의 세계 지도가 실려 있다. 동서를 잇는 위도는 현재와 같이 적도를 0도로 시작해 북극까지 90도로 커지는 방법으로 나타내고, 남과 북을 잇는 경도는 동쪽과 서쪽으로 180도로 나누어 표시했다. 현재의 경도와 비교해도 불과 몇 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다. 당시에 이런 고도의 지식을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계 곳곳을 여행한 상인이나 로마 관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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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그런데 서구의 중세시대는 이렇게 발달된 지도 제작술을 계승하지 못했다. 중세 사회는 폐쇄적이고 봉건적이었기에 지역 간의 교류가 막히면서 지도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지도로 〈T–O 지도〉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지도라기보다 기독교의 신앙관을 나타낸 ‘신화 지도’에 불과하다. 이 지도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대륙을 3분하여 표시하고, 지중해와 나일강 등이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지도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위치하고 지도의 꼭대기에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 등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조선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둥근 모양의 세계지도인 〈천하도〉와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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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도>

 

〈천하도〉 역시 지도의 중심에 중국을 두고 조선은 주변에 작게 표시했으며, 내해와 환대륙에 수십 개의 가상 국가를 표시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표현한 관념도로 볼 수 있다.

 

 

 

 

 

지도사에 업적을 남긴 이슬람 문화

 

서구 사회가 중세시대를 보내고 있을 무렵, 아랍 세계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바탕으로 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 유럽에 이르는 거대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면서 문화 중흥기를 맞이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가 일궈낸 문화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슬람 지도학자들은 이미 9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작품을 아랍어로 번역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들은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얻은 지식도 지도에 반영했다.

 

지도 제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이슬람 학자는 알 이드리시Abdullah Al-Idrisi다. 당시 지리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시칠리아의 왕 로제르 2세Roger II를 만나면서 그의 지도 제작술은 활짝 피어났다. 그가 그린 세계지도는 이전과 달리 남과 북이 거꾸로 되어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물론 중국연안까지 지도에 포함시킨 것이나, 중국의 동쪽 해상에 ‘신라Al-Silla’로 이름 붙인 섬 5개를 배치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표시한 최초의 세계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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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

 

15세기에는 유럽의 지도 제작술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 유럽인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406년에 《지리학》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 번역서에 근거해 만들어진 지도들이 곳곳에서 제작되었다. 유럽인들이 지도 제작에 새로운 눈을 뜬 것이다. 15세기는 포르투갈의 엔리케Henrique 왕자가 최초로 탐험대를 파견해 대항해시대를 개척한때이기도 하다. 항해에 필요한 정확한 세계지도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거기에 1450년대 이후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한 인쇄술은 《지리학》에 대한 열광과 지도 제작술 발달의 요인이 되었다. 이 책이 개정판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지도가 첨가되거나 보완되었다. 1427년에는 북유럽 부분이, 1472년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스페인 등이 추가 및 보완되었다. 이처럼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의 재발견은 서양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세계지도는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아메리카까지 추가되면서 점점 현대의 세계지도와 닮아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지구가 표면의 약 3분의 2를 덮고 있는 하나의 대륙과 그것을 둘러싼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대륙 발견으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뒤이어 계속된 마젤란의 세계일주로 유럽인들은 지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수많은 탐험과 발견을 통해 세계지도는 바다와 육지의 윤곽이 점점 분명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지도 제작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지도학이 가장 먼저 발달했다. 네덜란드의 지도학자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는 1569년 ‘메르카토르 도법Mercator projection’을 발명해 근대 지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도법에 따르면 경선의 간격은 고정한 채 위선의 간격으로 각도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어 평면지도에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대륙과 대양의 형태와 크기가 왜곡되어 남아메리카 대륙보다 8배나 적은 그린란드가 더 크게 표시되었다. 이후 플란치오Petro Plancio,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혼디우스Jodocus Hondius, 블라외Willem Janszoon Blaeu등 여러 지도학자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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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도법이 적용된 세계지도

 

동아시아에 진출한 여러 서구 열강 중 특히 지도 제작에 뛰어났던 프랑스는 동아시아의 지도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는 지도 제작을 적극 지원했던 루이 14세Louis XIV와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지원으로 지도학자들은 지도 제작을 위한 대대적인 측량 사업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지리 정보를 과학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이름 높았던 당빌Jean Baptiste Bourguignon d’Anville이 가세하면서 동아시아 지도 제작은 활기를 띠었다. 그는 1737년 새로운 동아시아 지도인 《신중국지도총람》이라는 지도책을 완성하는데, 이 책에는 〈조선왕국전도Royaume deCorée〉가 실려 있다. 이는 조선을 독립국가로 인정한 최초의 유럽 지도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도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김정호가 이전의 자료를 바탕으로 지도를 편집・제작한 점을 상기할 때, 당빌이 제작한 지도도 〈대동여지도〉 제작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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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빌이 제작한 한국의 지도

 

지도를 그릴 때, 누구나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지도와 같이 여러 나라가 동시에 포함된 지도를 그릴 때는 이 외에 또 다른 요소가 개입하게 마련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국경선이다. 지도에 어떻게 표시하느냐에 따라 국경선이 달라지고 그 나라의 면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마다 지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는 정치 권력의 압력을 받은 지도 제작자가 자국에 유리한 지도를 그렸다는 뜻이다. 이는 북아메리카를 놓고 벌어진 열강의 지도 전쟁이나 아프리카 지도의 국경선 쟁탈전에서 명백하게 나타난 사실이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그렸던 지도는 근대 역사에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지도를 가진 자가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더 많은 부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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